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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김상덕 목자님 김선주 목녀님을 소개합니다. | 조회수 : 684 |
작성자 : 이종관목사 | 작성일 : 2014-02-21 |
작년 11월에 김진석 목장에서 분가한 김상덕 목자, 김선주 목녀입니다. 목자 간증을 함께 나눕니다.
31년 전“자네 교회 다니나? 라는 예비 장모님의 질문에 순간 당황하며 대답한 말
저는“무교입니다.”라고 했지요.
등줄기에 식은땀이 나더군요. 당시 현역 대위로 근무할 때인데 결혼 허락을 받으러 아내 부모님께 첫 인사 드리던 날, 장모님과의 단독 면담 때 있었던 일입니다. 그 때 처갓집은 모두 예수님을 믿고 손아래 처남은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장교로 근무할 때였습니다. 아! 예수 믿는 집안이구나! 그 순간 앞이 캄캄하여 ‘아! 이 결혼은 안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전 위기만 모면하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육군 장교라는 신분 확인으로 물론 면담은 통과되고, 일사천리로 저희 집에서 결혼을 밀어 붙였습니다. 저희 집은 그야말로 예수님의 ‘예’자도 모르는 불교+유교+토속신앙 가정이었습니다.
30여년이 지나 제가 예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는 건 그 때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결혼만 하면 된다.’는 생각만 했으니까요. 결혼 후 어떤 시련과 핍박이, 아픔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전혀 예측도 생각도 못했습니다.
견딜만한 시련만 주신다 하셨지만 참 캄캄한 날이 많았습니다.
결혼 1주일 만에 아버지 별세,
결혼 2달 만에 어머니 맹장수술,
결혼 5달 만에 어머니가 변비로 입원하셨다가 갑상선 수술하시고 그리고 경제적 인 압박!
나이 서른도 안 된 신혼부부에게 휘몰아치는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며느리 들어와서 일어난 일이라고 몰아치는 일가친척들의 독설과 냉대, 저희 집에서 서둘러한 결혼인데 아내의 시련이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저는 군 생활만 해왔고, 경상도 남자의 무뚝뚝함이 그 어떤 위로도 못해주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아내의 시련을 알게 된 장모님은 내 딸이 무슨 잘못이 있어 시어머니께, 일가친척들에게 그런 냉대를 당하느냐고 자네도 내 딸이 잘못이라 여기면 지금 바로 데려가겠다.’며 오셨습니다. 정말로 면목이 없었습니다.
그 후, 아이가 태어나고 신혼 때부터 저는 동료들과 어울려 ‘새를 잡고’, 아내가 고스톱을 그렇게 표현하더군요. 퇴근해 오면 어린 딸이 아빠! 오늘은 새 몇 마리나 잡았느냐고 물어보기도 했답니다. 그렇게 음주 가무를 즐기면서 생활했습니다.
제 어머니는 아내에게‘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교회에 가지 말라’하시고 워낙 저희 집 핍박이 심하니,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낯선 울산에 온 아내는 외롭고 의지할 곳이 없었습니다. 저의 늦은 귀가에 한없이 외로운 아내는 아이를 안고 교회에 다녀오곤 했습니다.
그 후, 목사님이 심방을 오시고, 저는 피하고, 어느 집사님은 좀 맞아야 정신 차린다고 악담 아닌 악담도 하시더군요.
교회를 다니면서 불어 닥친 시련은 정말 우리 부부를 벼랑 끝까지 몰고 가는 것 같았습니다. 특히 예배를 빼먹거나, 십일조를 떼어먹은 후에 빈번히 일어났던 사고들도 많았습니다.
교통사고로 큰 물질적인 손해, 아들이 차에 치어 밑에 깔려 생사를 넘나드는 사고, 신호 받고 정지하고 있는데, 갑자기 50여 미터 앞에 있던 차가 쭉 후진해 오며 부딪힌 이해할 수 없는 일, 한잔하고 귀가하다 좌회전 하려고 정지해 있는 차를 그대로 들이받은 일, 덤프트럭 기사의 졸음운전으로 제 차가 덤프트럭에 추돌하여 180도 회전해서 50여 미터 끌려간 사고! 그 순간 다들 제가 사망했다고 했지요! 셀 수 없이 수많은 차사고 또 사고들 이었습니다.
저는 공무원으로, 아내는 학원을 운영하면서 많은 물질을 모았었지만, 저희 손에 남는 것 없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왜 그러시는지 몰랐습니다.
그 많은 사고에도 제 몸은 털끝 하나 상하지 않았음을 나중에야 깨달았습니다. 얼마나 주님이 절 사랑하셨는지도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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