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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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190714 베드로의 부인과 희롱 당하시는 예수님(누가복음 22장 54절-71절) 조회수 : 932
  작성자 : 교회사무실 작성일 : 2019-07-13

Ⅰ. 멀찍이 따라가는 믿음

제자는 멀찍이 따르는 자가 아니라 주님 곁에서 동행하는 자이다. 주님을 가까이 따르는 자이다. 고난이나 실패로 인해 주님께 등을 돌리지 말자. 절망과 슬픔 중에도 주님 곁에 머물러 있으면 주님이 일으켜 주실 것이다.

1>멀찍이 따라가는 사람 (54-55절)
예수님이 체포되어 대제사장의 입으로 끌려가셨다. 그때 베드로는 멀찍이 뒤따라갔다. 언제든지 도망갈 수 있도록 말이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따를 때가 많다. 예수님을 열심히 따르다가도 고난과 시련이 찾아오면 뒤돌아간다. 진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간다. 그러나 가짜는 그렇기 때문에 뒤돌아선다.
베드로는 뜰에 들어가서 추위를 피하려고 불가에 앉았다(55절).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이 있다. 일신의 유익을 위해서는 수치와 불법도 불사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믿음생활이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라면 불가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베드로와 다를 바가 없다. 예수님은 대적들에게 심문당하고 계신 상황에서 말이다. 우리의 믿음 생활이 나의 유익을 위한 것인지,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께 진정으로 헌신하는 것인지 주님은 알고 계신다.

2>예수님을 부인하는 베드로 (56-57절)
그때 어떤 여종이 베드로를 알아보았다(56절). 베드로는 원래 시골 어부였는데, 예수님 덕분에 누구나 알아보는 유명인이 되었다. 놀라운 말씀을 듣고, 신기한 기적도 체험했고, 좋은 일을 한다고 인정도 받았다. 그러나 유명인이 된다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책임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자신의 내면의 균형이 무너져 있음을 몰랐다. 다른 사람에게는 베드로가 보였지만 정작 그에게는 자신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베드로는 부인하였다.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57절). 베드로는 위기를 모면하려고 거짓말을 했다. 선한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주님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누군지 몰랐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자신이 무슨 잘못을 하는지도 몰랐다.

3>베드로의 통곡 (58-62절)
여종 외에도 두 사람이나 더 베드로를 알아보았지만, 베드로는 계속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잡아뗐다. 세 번째로 예수님을 부인하자 닭이 울었다(60절). 너무 자신만만한 나머지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는 것도 모르고 있을 때가 많다. 그러므로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한다(고전10:12).
베드로는 결국 주님의 말씀을 떠올리고 통곡하였다(61-62절). 베드로의 통곡은 지극히 인간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매우 정직하다. 비참한 실패에도 절망하지 않고 괜찮은 체 포장하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회복의 소망이 요원하다. 그래서 실패자보다 더 문제가 많은 인생이 완벽주의자다. 완벽한 인생, 완벽한 신앙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사람은 스스로 영적 진단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치료도 불가능하다. 오늘은 통곡하자. 그리고 내일 일어서자.

Ⅱ. 재판장과 피고인

모든 인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불의하다. 한낱 죄인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겸손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한다.

1>예수님을 조롱하는 사람들 (63-65절)
예수님을 대제사장 앞에 세운 사람들이 예수님을 희롱하고 때렸다(63절). 그들의 역할은 그저 피고인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정죄하고 모욕하기까지 했다. 인간은 모순덩어리이다. 자신이 좋은 학교를 다니면 좋은 학생인 줄 알고, 좋은 교회를 다니면 좋은 성도인 줄 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비난하는 자리에 서면 스스로 의로운 줄 안다. 그래서 교만은 거짓이다.
예수님의 눈을 가리며 때리고 희롱한 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다. 너를 친 자가 누구냐? (64절). 인간의 교만은 안하무인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께가 자기 발아래 두려고 한다. 자신이 무지하면 신도 무지한 줄 알고, 자신이 악하면 신도 악한 줄 안다. 인간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서 신을 이해하는 것이 신화이고, 만신전이고, 샤머니즘이고, 종교다원주의다. 그들은 신을 초월자로 인식하지 않기에 신을 모르는 것이다. 신이 나와 같은 줄로 착각하는 것, 아니 정말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것이다.

2>공회의 심문 (66-68절)
밤에 체포된 예수님은 대제사장에게 심문을 받으시고 아침에 공회로 끌려가셨다(66절). 예수님께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저들에게는 불의와 불법의 연속이었다. 장소를 옮기고 시간을 끌며 심문을 계속할수록 죄목은 예수님께 쌓여가는 것이 아니라 저들에게 쌓여 가고 있었다. 저들은 이미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과 같았다(벧후1:21).
그들은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67절)라고 추궁하였다. 속 시원하게 말하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니라(67-68절). 알아들어야 말하지 않겠느냐는 말씀이다. 유치원생에게 물리학 교수가 강의를 한들 알아듣겠는가? 질문을 한들 대답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 겸손히 인정이라도 해야 하는데 그들은 그조차 하지 않았다. 신앙생활에서 주객이 전도되면 우리의 신앙은 위험한 독이 될 수 있다.

3>하나님의 아들의 심문 (69-71절)
예수님은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69절) 라고 선언하셨다. 인간과의 실랑이가 끝나고 예수님은 이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실 것이다. 예수님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라는 질문에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라고 대답하셨다(70절). 복잡한 미적분 공식을 덧셈, 뺄셈밖에 모르는 아이들이 풀겠다고 덤벼드는 꼴이다. 그저 주님을 인정하는 것이 참 지혜다. 그들은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나서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71절) 라면서 증거를 확보했다고 자신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을 정죄하는 증거가 아니라 그들을 정죄하는 증거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부인했기 때문이다. 세상의 무신론자들과 과학 신봉자들은 신들 몰아세울 증거를 확보해 간다고 자신하지만 그것은 곧 그들을 천상의 피고석에 앉히는 증거들이 될 것이다. C.S. 루이스의 [피고석의 하나님] 이라는 책이 있다. 인간이 아무리 신을 피고석에 앉혀 놓고 심문할지라도 자신의 죄악만 쌓는 것이다. 반전의 그날을 두려워하여야 한다. 주님이 참고 기다려 주실 때 속히 돌이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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