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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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190721 죄 없는 예수님께 내려진 사형 선고(누가복음23장1절-25절) 조회수 : 561
  작성자 : 교회사무실 작성일 : 2019-07-30

사형을 언도할 권한이 없는 산헤드린은 예수님을 그 지역의 사법권을 가진 로마 총독에게 끌고 갔다. 그들은 예수님이 납세를 금지하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칭했다며 문제 삼았다. 로마 법정에서 사형을 언도받을 만한 죄목으로 고발한 것이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매우 치밀한 계획으로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갔지만 예수님은 저항하지 않으시고 불의한 권력을 허용하셨다.

Ⅰ. 어떤 친구가 될 것인가?
사람과 사람은 좋아하는 것이 같을 때보다 싫어하는 것이 같을 때 더 빨리 친밀해진다고 한다. 본문은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 원수였으나 예수님을 재판에 넘기던 날에 서로 친구가 되었다고 전한다(12절). 예수님이라는 공공의 적이 생기자 서로 협력적인 관계가 된 것이다. 그들의 죄악상은 부당한 재판 과정을 묵묵히 참으신 예수님의 자비와 죄인들의 친구로 오신 그분의 사랑을 부각시킬 뿐이다.

1>빌라도의 심문 (1-5절)
공회는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로 고발하였다. 공회원들은 예수님을 빌라도의 법정으로 끌고 가 예수님이 백성을 미혹했다고 고발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사실과 달랐다. 예수님은 백성을 선도하셨을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위증임을 알면서도 예수님을 사형시키기 위해 억지를 부렸다.

빌라도는 그들의 주장을 확인하기 위해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질문했다. 이에 예수님은 ‘옳다’라고 대답하셨다(3절). 빌라도가 예수님을 무죄로 판결하자(4절), 무리는 더 강하게 종용했다(5절). 정의의 기초가 되어야 할 재판정이 실정법보다 정서법에 좌우되는 모양새이다. 세상 법정에는 절대 정의가 존재할 수 없다. 유일하고 불변하는 정의의 기초는 하나님밖에 없다.

2>헤롯의 심문 (6-10절)
빌라도는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인지 묻고서 헤롯의 관할로 판결을 떠넘겼다(6-7절). 한 사람의 생명이 달려 있는 문제에 대해 책임을 회피한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하는가, 부인하는가에 대한 책임 회피였다. 결국 빌라도는 예수님의 생명이 좌우되는 판결을 회피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이 좌우되는 판결을 회피한 것이다. 이는 백성과 타협해서 예수님을 죽게 만든 것 이상으로, 악과 타협해서 자신을 죽게 만들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헤롯은 예수님을 소문으로만 듣다가 직접 보고는 기뻐했다(8절). 이적을 바라는 그 앞에서 예수님은 자기변호를 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빌라도나 헤롯을 상대하지 않으신 것이다. 주님은 그들의 친구가 아니라 유대인의 왕이시므로, 그들의 비위를 맞춰줄 필요가 없으셨다.

3>헤롯과 빌라도 (11-12절)
헤롯은 묵묵부답인 예수님을 보고 실망했다. 그래서 군인들과 함께 예수님을 희롱한 후 다시 빌라도에게 보냈다(11절). 누가는 전에 원수였던 헤롯과 빌라도가 당일에 친구가 되었다고 기록한다(12절). 여기서 친구라는 단어의 어감은 본래의 뉘앙스와는 다르게 다소 냉소적으로 느껴진다. 그들이 죄로 맺어진 관계임을 암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의 모습은 외로운 죄인들을 친구로 삼아 주신 예수님의 모습과 대조적이다(7:34).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어떤 것을 기반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가? 죄인가 아니면 복음인가? 선하시고 흠이 없으신 예수님은 복음을 기반으로 죄 많은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다.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였다. 우리도 복음을 기반으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럴 때 주님이 기뻐하실 것이다.

Ⅱ.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예수님의 사형 문제를 두고 빌라도와 유대인 무리가 대립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죄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폭동이 일어날까 두려워 적당한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큰 목소리로 억지를 부리며 으름장을 놓았다. 반면 예수님은 어느 때보다 잠잠히 침묵을 지키셨다. 우리는 어떤 목소리를 내고 있는지, 어떤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 돌아보자.

1>죄가 없으신 예수님(13-15절)
빌라도는 종교 지도자들과 사회 지도자들과 일반 백성까지 모아 놓고 말했다(13절). 이 사건에 모든 유대인이 지대한 관심을 보인 만큼, 빌라도는 심리적인 압박감을 느꼈을 것이다. 예수님은 야밤에 체포되었는데, 바로 그날 백주대낮에 처형당할 운명에 놓이셨다. 급속도로 진행되는 석연찮은 재판에 빌라도는 제동을 걸려고 시도하였다. 그는 심문 결과를 발표했다. 유대인들이 고발한 범법 사항을 예수님에게서 찾지 못했다는 내용이었다(14절). 헤롯도 동일한 심문 결과를 내렸다(15절). 죄를 찾지 못했다면 무죄다. 예수님은 풀려나야 마땅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지 않으셨고, 불의한 재판 과정이 진행되는 것을 막지 않으셨다.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만 바라보며, 어리석은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침묵하셨다.

2>때려서 놓겠노라(16-21절)
빌라도는 예수님을 처형하지 않는 대신 때려서 놓겠다고 했다(16절). 그는 로마 제국이 피지배 지역에 파견한 총독이었다. 과연 정치인답게 타협안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흥분한 유대인은 빌라도의 타협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수님의 사형을 진행하고 대신 바라바를 놓아 주라고 외쳤다. 바라바는 민란과 살인 죄목으로 수감 중인 사람이었다(18-19절).

빌라도의 타협안은 자구책이 아니라 자충수가 되었다. 진실을 호도하고 정의를 타협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이익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예’와 ‘아니요’를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 정의의 초석이 된다. 빌라도가 예수를 풀어 주려고 하자, 무리는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다(20-21절). 공자는 ‘민심이 천심이다’ 라고 말했고, 동학에서는 인내천(人乃天)을 말하지만 때로 불의한 민심은 악의 증폭기 역할을 할 뿐이다. 이것이 여론의 한계요, 위험이다.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하지 말자.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자.

3>십자가에 못 박으라(22-25절)
빌라도가 세 번째로 예수님을 때려서 놓겠다고 말했지만(22절), 목소리 큰 무리가 이겼다(23절).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에 굴복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했다(24-25절). 죄가 없는 예수님을 체포해 십자가에 죽게 한 사건은 오늘날에도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지금도 우리는 시시때때로 자신의 이익에 따라 큰소리를 내며 주님의 음성을 묵살한다. 이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주도적으로 예수님을 두 번 죽이는 셈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침묵에 주의해야 한다. 그 침묵에 담긴,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죄인들을 향한 사랑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목소리를 잠재우고 성령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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