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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190630 아버지의 뜻대로 됩니다 (누가복음 22장 39절 - 53절) 조회수 : 1270
  작성자 : 교회사무실 작성일 : 2019-06-28

크리스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욕심이 앞서서 내 뜻을 꺾고 싶지 않은 때도 생기고, 하나님의 뜻을 의심하는 경우도 생긴다.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대하는 것이 크리스챤의 바른 태도인가?

Ⅰ. 겟세마네의 기도 (39-46절)

눅22:39-23:56 까지는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로 시작해서 재판을 받으시고, 십자가형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장사지낸바 되기까지의 기록이다.

예수님은 습관을 따라 늘 하시던 대로 감람산에 올라가 기도하셨다(39절). 기도는 예수님에게 무언가를 이루는 수단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었다. 우리도 거룩한 습관을 형성해야만 좋은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습관이 잘못된 사람들은 믿기는 믿어도 자기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덕이 안 된다. 습관화되기 위해서는 반복해야. 변화는 반복을 통해 이루어진다. 나이가 들면 사람이 잘 변화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습관으로 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재 좋은 습관으로 무장된 사람은 미래가 밝다. 다음 세대나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좋은 습관이다. 몸에 습관이 되도록 반복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기도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 듣고 순종하는 것. 그리고 회개하는 생활이다. 그런 간단한 것들을 습관화시키는 것을 통해서 우리 삶의 모든 것이 변화의 열매를 생산하게 된다. 변화와 성장은 습관과의 싸움이다.

예수님과 같이 거룩한 습관을 일상화하면 고난의 때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라고 권고하셨다(40절). 우리 앞에 고난의 터널이 놓인다면 통과해야 한다. 고난은 우리를 넘어지게 할 수 있지만, 고난을 당한다고 모두가 실족하지는 않는다. 주님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한결 같이 기도하는 습관을 지닌다면 고난이 찾아와도 결코 실족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은 정말 간절히 기도하셨다.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42절) 예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사람들도 경우에 따라서는 초연하게 대할 수 있는 죽음을 그토록 고통스럽게 대해야 했을까? 그때 예수님께서는 죄 자체 다시 말해서 모든 죄를 상대로 하는 결전을 벌이고 계셨던 것이다. 우리들은 기껏해야 한두 가지의 죄를 상대로 해서 싸우거나 한두 가지의 죄로 인해 양심의 가책을 받을 뿐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죄 자체를 상대로 해서 결전을 벌이고 계셨으며, 온 인류가 범한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양심의 가책을 받고 계셨을 것이다. 예수님의 고통은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하나님께 심판을 단번에 받는 아픔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수님의 기도는 정직하면서도 경건한 기도의 모범이다. 기도는 내 뜻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나를 굴복시키는 것이다. 또한 기도는 고통의 중력과 은혜의 동력 사이의 영적 줄다리기이다. 하늘의 천사들이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도왔고, 예수님은 혈한(血汗)을 흘리셨다(43-44절).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는 자리에 이르신다.

Ⅱ. 유다의 배신 (47-51절)

주님이 여전히 동산에 계실 때, 가룟 유다가 가까이 왔다(47절). 반역자 가룟 유다는 짜여진 각본에 따라(눅22:3-6) 하수인들을 끌고 현장에 나타났던 것이다. 앞서 온 유다가 반가이 달려가 예수님에게 입을 맞추려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라고 물으셨다(48절). 입을 맞추는 것은 사랑의 표시인데 유다는 그 입맞춤을 반역의 암호로 삼았던 것이다. 더러운 것일수록 자신을 더 아름다운 것으로 감싸려고 한다. 사람마다 수치스러운 곳을 가리지 자랑스러운 곳을 가리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사랑하는 체하면서 해치고 도와주는 체하면서 사기 치는 죄인의 모습이다.

친교의 동산이 배신의 언덕으로 전락한다. 이것이 관계의 난점이다. 기대했던 만큼 실망하고, 신뢰했던 만큼 배신감을 크게 느끼고, 사랑했던 만큼 미워하게 된다. 아무 관계가 없었다면 마음 아플 일도 없다. 나를 사랑하고 신뢰하는 누군가에게 상처 준적은 없는지,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적은 없는지 돌아보자.

베드로는 칼로 대세사장 종의 귀를 베었다(49-50절). 유다의 배신도 슬프지만 베드로의 폭력도 서글프다. 주님의 마음을 모르기는 매한가지다. 주님은 “이것까지 참으라” 라고 하신다(51절). 십자가를 통한 구원이라는 대의를 위해 불의의 가시밭길도 가시겠다는 뜻이다. 불의의 편에 서지도 말고, 분노로 대의를 가로막지도 말자.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외길을 가자.

Ⅲ. 지금은 너희 때다 (52-53절)

예수님은 자신을 잡으러 온 무리에게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라고 말씀하셨다(52절). 종교인들과 하수인들은 명분도 부족하고 사람들의 시선도 두려워서 밤에 이런 일을 했다. 주님은 마치 죄인처럼 체포당하는 상황에서도 당당하셨다. 그렇게 하심으로 의를 위해 스스로 고난의 길을 가심을 확증하셨다.

주님이 마음이라면 불의와 고난 중에도 담담할 수 있다. 예수님은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라고 말씀하셨다(53절). “악인들의 때”라는 말씀이다. 사탄은 자기 뜻대로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마26:53-54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요18:4-6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당시에 십자가는 악인들의 뜻이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아버지의 뜻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가 참된 크리스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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