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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순교자의 발자취를 따라서 | 조회수 : 1681 |
작성자 : 고성준 | 작성일 : 2009-08-13 |
여행일정 : 2009년 8월 5일(수) 오전 10시. 시민교회 집합 -> 8월 5일 오후 여수 애향원 ->
남도시민교회 수요 저녁예배 -> 시민교회(사랑의 집) 숙소 1박 -> 신안군 증도 문화 탐방 ->
시민교회(사랑의 집) 1박 -> 사천 항공 박물관 관람 -> 울산 도착 (2박 3일)
1. BUS는 기름(연료)만으로는 출발할 수 없다.
어린이 11명 성인 27명 총 38명이 버스에 올라 제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나 설레는 마음으로
출발을 기다리는데 출발할 생각을 않는다. 그러던 중 이종관 목사님이 버스에 올랐다.
"출발서부터 울산도착할 때까지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함께 하옵소서." 라는 간절한 기도와
함께 출발을 하였다.
교회를 출발한 버스는 "자랑하지 말라"는 도시 전라남도를 향한다. 여기서 "자랑하지 말라"는
의미는 "여수에서 돈자랑하지 말고.. 순천에서 인물자랑하지 말고 벌교에서 주먹자랑하지
말라는 남도의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다. 여수는 옛날부터 항구도시로써 선박 사업으로 부를
축적한 재벌들이 많다는 뜻이고, 순천에서 인물자랑하지 말라는 뜻은 순천지역의교육열이타도 ,
시에비해높아 많은순천지역의 인물이 법조계 관계에 진출하엿다는 뜻이라고 한다.
벌교에서 주먹자랑하지 말라는 뜻은 벌교는 옛날부터 체육을 중요시하여 많은 스포츠인들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특히 기독교인들 중 유명한 PGA 골프선수 최경주의 고향이기도 하다
2. 순교자 손양원 목사의 기념관 여수 애향원 탐방.
어느덧 버스는 여수 공항 울타리를 돌아서 여수 애향원에 도착하였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코를
찌르는 분뇨 냄새가 머리를 아프게 한다. 알고보니까 여수 애향원은 많은 나병 환자들의 생계를
돕기 위해 인근에서 양계장을 운영하여 왔다고 한다.
3. 손양원 목사님은 어떤 분인가?
출생. 사망 : 1902년 6월 3일 (경상남도 함안에서 출생)
1950년 9월 28일 사망
학력 : 스가모 중학교
경력 : 1938년 소록도 나병환자 수용소 애향원 교회 부임
1940년 신사참배 거부 여수 경찰서 구금
1945년 8월 15일 광복으로 출옥
1946년 목사 취임
영남에서 태어나 호남에서 순교한 손양원 목사. 그가 48세의 젏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 여수
애향원이 순교의 꽃이라면 경남 함안의 칠원교회는 순교의꽃을 피운 뿌리와 같다. 손양원
목사는 일본 제국주의의 신사참배를 거부해 갖은 고초를 겪었고 출옥 후에는 한센병(나병)
환자들의 피고름을 입으로 빨아 치료하는 등의 예수의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였다고 한다.
4. 손양원 목사님을 키워낸 부친 함안 칠원교회 손종일 장로님의 이야기
일제시대 손양원 목사가 신사 참배 반대로 여수 경찰서에 끌려 가던 날 아버지 손장로님께걱정을
끼쳐 드리지 않으려고 "잠깐 다녀 오겠습니다."고 하직 인사를 하였다. 손장로는 일본 순사 앞에서
말을 아끼며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눅 9:62)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마 10:37-39) 라고 말씀하였다고 한다.
5. 손 목사 두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아들 삼아
1948년 여순 사건으로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아들 삼고, 그 후 2년 만에 공산당에 의해 총살
당했다
6. 손목사의 9가지 감사 순교의 기도
1) 순교의 자식을 낳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2) 이런 보배(나병환자)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3) 삼남삼녀중 장남, 차남을 바치게 하신 축복을 감사합니다
4)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한데 두 아들의 순교, 감사 만만 합니다
5) 예수를 믿다가 자리에 누워 임종하는 것도 축복이라고 하는데, 하물며 전도하다가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을.... 감사합니다.
6) 두 아들을 총살시킨 원수를 회개시키며 내 아들을 삼고자하는 사랑하는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7) 아들의 순교 열매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것이 믿어지니 감사합니다
8) 이같은 역경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과 여유있는 믿음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9) 끝으로 오.주여 나에게 분수에 넘치는 과분한 복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니이다
이상의 9가지 기도는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진정한 순교자의 삶을
생각케 한다.
7. 치료하시는 하나님
여수 애향원을 뒤로하고 BUS는 남도 시민교회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영
생각하지도 못한 곳에 BUS가 정차하였다. 그런데 잠깐 밖을 보니 우리 일행 중 어떤 남자
집사님이 한손으로 엉덩이를 뒤로 가리고 앞으로 정신없이 뛰어간다. 가만히 보니 화투에
똥광이 그려진 곳으로 직행 중이다. 한참을 기다려도 영 돌아올 생각을 않는다. 기다리던 중
젊은 남자 집사님이 찾아나섰다. 그런데 다시와서 BUS 짐칸에서 갈아입을 속옷을 챙겨 다시
똥광 그려진 곳으로 간다. 옷을 갈아 입고 얼굴 밝게 걸어나오시는 집사님... 얼마나 시원했을까?
알고보니 변비로 고생하셨는데 애향원 순교지에서 치료의 응답을 받아서 BUS속에서는 한바탕
하하하-
8. 남도시민교회 수요예배
남도시민교회에는 울산시민교회에서 준비한 2채의 아담한 집이 있다. 마당 안에까지 봉고
BUS가 들어갈 수 있고 또한 간이 상수도가 있어서 수세식 화장실, 샤워실이 현대식으로 잘
갖추어져 있다. 가져온 여행용 가방 등 여장을 풀고 남도시민교회 김상길 목사님 부부의 따뜻한
영접을 받아 남도시민교회 권사님이 운영하는 식당 "별천지"에 도착, 남도의 맛갈스러움과
권사님의 정성과 사랑이 담긴 음식으로 맛있는 식사를 끝낸 후, 남도시민교회의 수요예배는
생각하지 못한 은혜스러움이 있었다.
울산시민교회 참석자 40명 남도시민교회 10여명이 자리에 앉았다. 교회 의자는 만원 만약에
울산에서 BUS 2대가 갔다면 좌석에 앉지 못하여 서서 예배 하였을까? 김상길 목사님 만면에
기쁨이 넘친다.
오랜만에 교회가 꽉 찾으니까. 그런데 조금 늦게 도착한 남도시민교회 여집사님이 어리둥절
갑자기 누가 핵폭탄 전도를 하여 교회가 꽉 찼을까? 목사님께서 설명을 하신다.울산 시민교회
교우들이 참석하였다고...
은혜로운 예배는시작되었고
김상길 목사님이 "찬양을 시작하겠습니다"라고 선언하셨는데 "울산시민교회는이런것 없지요?"
하며 자랑하신다. 강대상 옆에 대형 화면이 걸려있고 목사님께서 직접 찬양 반주기를 조작.
마치 노래방에 대형화면이 설치되어 있는 것 같다.
"울산시민 교회는 이런 복음송 알런지 모르겠네, 알아요?"
울산시민교인 "예, 압니다 "
목사님 " 이런신곡 복음송 우리만(남도시민교회) 아는줄 알았는디."
어느듯 밤은 깊어지고 내일을 기대하며 모두들 꿈 속으로.
9. 천사의 섬. 천국의 섬. 보물섬 증도로 가다
신안군은 1004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어 천사의 섬이라고 한다.
그러면 천국의 섬은 무슨 뜻인가. 증도섬 주민의 90% 이상이 기독교인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이면에는 섬교회의 어머니. 최초의 여성순교자 문준경 전도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문준경 : 1891-1950
그는 여성순교자로서 여러 섬 지역을 돌며 주민들의 심부름. 짐꾼. 우체부의 역할을 하며
신안군의 여러 섬에 교회를 개척하며 중동리교회, 대초리교회 등의 10여 교회를 개척하였고,
오늘날 기독교계의 대표적인 인물 김준곤 목사님, 정태기 목사님, 이만성 목사님,
이만신 목사님, 이봉성 목사님 등 수많은 목사님들을 배출하는데 공헌하였다. 그녀의
복음전파에 대한 열정과 헌신 사역은 섬을 중심으로 한 호남 선교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그녀는 선교를 위해 섬 주위 돌작밭길을 얼마나 걸었는지 일년에 고무신 9켤레를 바꾸어 신어야
할만큼 열심히 전도하였으며 1934년 일제의 탄압으로 고생하였으며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며
목포 경찰서에서 엄청난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이때마다 문 전도사는 찬송가 "환난과 핍박
속에도 성도는 신앙지켰네"를 부르며 에스더서 4장 16절 "죽으면 죽으리라"를 수없이 되풀이
하였다.
1950년 10월 4일 국군이 중동리 섬에 들어 온다는 소식에 악의에 찬 공산당원들은 교인과
양민을 바닷가 모래 사장에서 한 사람씩 단도로 쳐 죽이는 만행을 져질렀다.
이 때에 문 전도사에게 "새끼를 많이 깐 씨 암닭이구만" 이라고 몽둥이로 내려쳤고 그때에 그녀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순교했다. 당시 59세. 이 사실을
옆에 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수양딸 백정희 전도사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면 보물섬 증도는 무슨 뜻이 있을까?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보물선이 발견된 곳 1976년 한 어부 그물에 청자가 걸려 올라오면서
시작된 해저유물의 발견은 세계를 놀라게 한 사건이었다. 1976년 10월부터 1984년 9월에 걸쳐
11차례의 발굴조사 및 인양작업으로 도자기 20661점, 금속제품 729점, 석제품 43점 동전류 28톤
등을 인양하였고 이 발굴은 세계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집중하였다. 그 성과는 한국, 중국,
일본의 교역사연구에 새로운 자료를 제공하였으며 고대무역선의 실체를 알게되어 동양문화사
연구에 길이 빛날 업적으로 남았다. 보물선의 발굴 해역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자리에
발굴기념비와 전망대가 세워져 있다(국가사적274호)
끝으로 2박3일 동안 많은 것을 보고 느끼게 해준 교회와 인솔하신 오종학 목사님. 함께한
성도님들에게 감사드리며 이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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