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250406 용서하기 위해 용서 받은 사람 (마태복음 18:21-35) | 조회수 : 126 |
작성자 : 교회사무실 | 작성일 : 2025-04-07 |
20250406 용서하기 위해 용서 받은 사람 (마태복음 18:21-35)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비유를 약간 수정해서 우리에게 적용한 것이다. 과연 나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답게, 은혜 안에서 살고 있는가? 아니면 나는 내가 얼마나 큰 죄를 용서받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마음의 감옥에 가두고 있지 않은가? 용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로서 우리가 부름 받은 일이지만, 행하기에 가장 어려운 일 중에 하나다. 용서는 자연스럽지 않다. 고통스럽다. 불공평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은 용서를 권장하신 게 아니라 명령하셨다. 한 번이 아니라, 일곱 번이 아니라, 무한대로 용서하라 명령하셨다. 왜 용서가 그렇게 중요할까?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상처가 여전히 남아 있는데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 예수님이 들려주신 용서 이야기를 통해, 어떻게 우리도 예수님처럼 용서할 수 있는지, 왜 예수님처럼 용서해야 하는지, 그 용서가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 함께 묵상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 어떻게 예수님처럼 용서할까?
첫째, 횟수를 세지 말고 무한대로 용서하라!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 18:21-22).
베드로는 “형제가 나에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줄까요? 일곱 번까지 할까요?” 그렇게 물었다. 베드로는 자신이 꽤 관대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유대 랍비들은 형제가 회개하면 세 번까지는 용서해주라고 가르쳤고, 그 이상 회개하는 것은 진실한 회개가 아니라고 여겼다. 그런데 베드로는 랍비들보다 훨씬 더 보태 일곱 번까지 용서하겠다고 한 거다. 일곱 번 정도면 완벽한 용서라고 생각한 거다.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이 충격적이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 18:22). 이것은 여러의미를 가질 수 있지만 용서의 횟수를 제한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라고 말씀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한도가 없어서, 죄가 아무리 많아도 약해지지 않고 더 크게 역사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자로서 그분의 성품을 반영해야 한다면, 우리의 용서에도 한도가 있을 수 없다.
용서가 아닌 것 |
1. 죄를 눈 감아 주는 것. (마 18:15-17는 죄를 반드시 다루라고 말씀한다) |
2. 누군가가 계속해서 나를 해치도록 내버려 두는 것. |
3. 일어난 일을 무의미한 일로 여기고 잊어버리는 것. |
용서가 맞는 것 |
1. 보복하려는 권리를 내려놓는 것. |
2. 누군가 내게 감정적으로 진 빚을 탕감해주는 것. |
3. 내가 받은 큰 용서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내는 것. |
예수님이 두 팔을 뻗으시며 말씀하신다. “그 짐을 나에게 주렴! 내가 그 짐을 질게!” 용서가 그런 역할을 한다. 용서를 통해 짓누르는 짐을 벗어 예수님께 드림으로, 자유 안에 걷는 인생 사시길 바랍니다!
※ 왜 예수님처럼 용서해야 할까?
둘째, 엄청난 빚을 탕감하신 주님의 무한한 자비 때문에 용서하라!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마 18:23-24).
‘결산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심판을 암시한다. 각 사람이 자기 행위에 대해 답변해야 하는 ‘심판의 순간’을 의미한다. 로마서 14:12는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롬 14:12)고 선언한다. 끌려온 종은 일만 달란트를 빚졌다. 한 달란트만 해도 고대 화폐 단위 중 가장 크다. 이것은 사람이 갚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일평생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일만 해도 이자조차 못 갚는다. 예수님은 이 터무니없는 액수를 통해 신학적 메시지를 주신다. 우리 죄로 인한 빚은 인간의 힘으로 절대 갚을 수 없을 만큼 막대하다. 그래서 우리 죄는 도무지 상쇄시킬 방법이 없다. 아무리 훌륭한 삶을 살아도, 어떤 선행을 해도, 거룩하신 하나님께 진 빚을 갚을 방법이 없다. 모든 인간은 영적으로 파산 상태다. 우리는 갚을 길 없는 빚을 진 채로 영원한 파산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그 모든 부채 문서를 찢어버리시고, 우리를 자유케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깊은 은혜의 바다 속에 가라앉히신 후에 절대로 다시 끄집어내지 않으신다. 이 은혜의 모태 안에서 새로 태어난 우리는, 더 이상 과거의 죄의 무게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주님의 은혜로운 모태를 통해 기적적으로 살아난 우리가, 다른 사람을 향해 마음의 문을 닫고 있을 수 없지 않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용서를 결단할 때, 성령의 감화와 도우심으로 우리는 우리가 받은 은혜를 베풀 수 있다. 어떤 상처와 아픔이라도 주님이 치르신 희생과 베푸신 은혜의 물결 위로 던져버리시기 바란다! 그것이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길이며,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에 옳게 응답하는 길임을 믿으며, 용서를 선택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 어디서 예수님처럼 용서해야 할까?
셋째, 공동체에서 선한 영향을 주기 위해 용서하라!
방대한 빚을 탕감받은 종이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동료 종을 만났다. 100데나리온은 100 일치 임금이다. 결코 적은 금액은 아니다. 하지만 방금 전에 자기가 탕감받은 6천만 일치 임금과는 비교할 수 없다. 얼마나 모순되고 부조리한 상황인가? 말할 수 없이 풍성한 은혜를 입은 종이 감사도 자비도 모른 채, 탐욕과 잔혹으로 점철된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 그는 동료 종을 붙잡고 당장 빚을 갚으라고 요구한다. 종은 엄청난 빚을 탕감받았는데도, 여전히 마음이 굳어 있었다. 은혜를 받았지만, 은혜를 모르는 자처럼 행동했다. 변화되지 못하고 결국 옛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다른 종들이 이 부당한 광경을 너무나 안타깝게 여겼다. 그들은 임금에게 가서 자초지종을 다 알린다. 이 종들의 반응이 무엇을 말해주는가? 용서는 개인의 문제만이 아닌 것이다. 이 사람이 저 사람을 용서하는가 하지 않는가의 문제는 두 사람의 문제만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인 것이다. 분노와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당사자에게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 주변 관계를 망가뜨리고, 고통의 파장을 확산시킨다. 가족 간의 앙금이 해결되지 않으면 가정이 쪼개어진다. 교회 성도들 간에 화해하지 못하면 교회 공동체가 분열된다. 친구 사이에서도 과거의 상처에 집착하면 우정이 깨지게 된다.
내 죄의 무게를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남의 죄를 붙들고 집착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 아는 사람은, 그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도 알리고 싶어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은혜의 강물을 경험했다면 그 강물을 다른 곳으로 흘려보내야 한다. 우리가 용서하기를 거부하면 강물을 막혀버리고 정체되어 썩어가게 된다. 은혜가 생명을 일으키는 물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독으로 바뀌게 된다. 용서하기를 결단할 때 은혜의 강물이 내 안으로 흘러 들어와 나를 살리고, 내 주변까지 살리게 되는 것이다. 내가 용서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가? 어릴 적 상처를 준 친구인가? 큰 사랑과 함께 큰 아픔도 주신 부모님인가? 그리스도인의 모델이라 여겼다가 나에게 실망을 준 신앙의 선배인가? 그가 누구든 내 능력으론 용서할 수 없다. 하지만 성경은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우리가 용서할 수 있다고 하신다. 내가 받은 은혜의 크기를 알고, 또 마지막 날 하나님의 바로잡으심을 믿고, 내 상처를 내려놓으시기 바란다! 그 사람을 용서하시기 바란다! 그리하여, 내가 살아날 뿐 아니라 공동체가 살리고 회복시키는 은혜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시길 바랍니다!
▶결론: 무한한 자비를 입은 자답게, 용서의 사람으로 살라!
우리는 모두 용서받은 사람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죄의 빚을 탕감받았고, 되갚을 수 없는 자비를 입은 존재다. 그 은혜가 우리를 살렸고, 지금도 살리고 있으며, 앞으로도 살릴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 은혜를 품고 세상으로 나아갑시다! 내가 약자이기 때문에 용서하는 것이 아니다. 감정적이라서 용서하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구원받은 자의 증거다. 용서는 은혜받은 자의 열매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을 짓누르는 분노와 상처의 돌덩이를 내려놓으십시오! 그 자리에 주님의 은혜로 흐르는 생명의 강이 흐르게 하십시오!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받은 자답게, 무한한 자비를 입은 자답게, 용서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용서가 복음에 응답하는 삶이고,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길임을 믿으며, 예수님을 따라 용서의 길을 순종함으로 걸어가는 울산시민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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