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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181021 집 안의 탕자, 큰 아들 (누가복음 15장 25절 – 32절) 조회수 : 929
  작성자 : 교회사무실 작성일 : 2018-10-19

아버지 생전에 상속을 요구하는 것은 아버지가 빨리 죽기를 바란다는 뜻이고 매우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아버지는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 배반할 자유가 없이는 참 사랑도 없음을 알고 계셨기에, 하나님도 우리가 그릇된 길을 가더라도 놔두실 때가 있다. 하지만 용인이 늘 승인은 아니기에, 스스로 속이지 않도록 성찰하고 점검해야 한다.

Ⅰ. 아버지께 돌아온 아들, 아들을 기다린 아버지

둘째 아들은 가진 것을 다 잃었을 때 자기 죄를 보았고 아버지 집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더 나아가 아버지의 조건 없는 영접을 경험(20절)한 후에는 사랑을 받기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된다.
아버지는 거지가 되어 돌아오는 아들을 먼저 알아보고 먼저 측은히 여겨주고 먼저 달려가 맞아준다. 아들은 떠났지만 아버지는 보내지 않았기에 돌아올 기약이 없던 아들을 아버지는 항상 기다릴 수 있었고, 남루한 차림이었지만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고, 체면을 팽개치고 달려갈 수 있었다. 우리가 돌아오기 시작하면 하나님은 더 서둘러 우리를 받아주실 것이다. 사랑은 중간에서 만나기다.

Ⅱ. 받아들이지 못하는 첫째 아들(25-30절)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가 잔치를 베푼 것을 알면서도 큰아들은 집 안으로 돌아가 장자의 도리대로 손님들을 접대하지 않는다. 그 대신 사람을 보내어 잔치를 벌인 이유를 확인한다. 아버지 집에 살면서도 아버지를 신뢰하지 못했던 것이다. 돌아온 동생을 위해 배설한 잔치라는 말을 듣고 큰 아들은 아버지의 지나친 사랑에 분노하여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집밖으로 나와서 설득하는 아버지마저 거절한다. 도리어 아버지를 자신에게 고된 일만 시키는 인색하고 고약한 고용주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동생보다 재산을 아버지와의 관계보다 자기만족을 더 소중히 여겼던 것이다. 둘째 아들은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아버지의 사랑을 신뢰하여 참 아들로 회복되었지만 큰아들은 자기 욕심을 숨기지 못해 아버지의 사랑을 조롱하는 죄인으로 전락했다. 그는 집 안에 있던 탕자였다.

Ⅲ. 집 안에 있는 탕자를 찾으러 나간 아버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돌아온 둘째 아들을 맞이하려고 달려 나갔던 아버지가 이제는 자신이 베푼 잔치를 거절한 큰아들을 맞이하려고 집밖으로 나왔다. 큰아들은 아버지가 베푼 잔치에 참여하지 않고 친히 손님을 맞이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아버지는 이미 큰 수치를 당했는데, 아들을 설득하려 문밖으로 나가면서 다시 한 번 수치를 자청한다. 그는 아들을 크게 꾸짖고 벌하는 대신에 간곡하게 설득한다. 이것이 우리를 살리려고 아들을 육신의 몸을 입혀 보내시고 십자가의 수치에 넘겨주신 하늘 아버지의 사랑이다.

Ⅳ. 집 안에 있는 탕자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아버지에게는 살아 돌아온 둘째 아들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세상에 없었다.
그를 얻은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 없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무슨 대가를 치르셨든지 결코 그것을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신다. 그것은 첫째 아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둘째만큼 첫째도 탕자였다. 하지만 아버지에게는 소중한 아들이었다. 큰아들은 유대교 혹은 바리새인들을 가리킨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의 태도가 바로 이 첫째 아들을 행한 아버지의 사랑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시면서 이렇게 기뻐하시고 존귀하게 여기시는데, 우리는 여전히 자신을 보면서 불만에 싸여 있지는 않은가? 내가 원하는 것만 추구하느라고 하나님이 즐거워하시는 일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Ⅴ. 형이 동생을 환영하지 못한 세 가지 이유

우리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하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탕자의 단계, 그 다음에는 탕자의 형의 단계를 경험하면서 점차 하나님 아버지의 단계를 향하여 나아가게 된다. 우리의 영적인 여정에 있어서 ‘탕자의 형의 단계’를 벗어나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루속히 ‘탕자의 형의 단계’에서 탈피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나아가고 싶은데 자꾸만 ‘탕자의 형의 단계’에서 지척거리고 있을 때가 많은 것 같다. 왜 영적 순례에서 오르다가는 미끄러지는 악순환을 반복할까? 모든 사람이 “죄의 종으로 사망에”(롬 6:16) 이르렀기 때문이다. 선하게 살아보려고 하지만 그럴수록 더 비참하게 실패한다. 삶의 한 쪽을 바로 세웠다 싶으면 다른 한 쪽이 무너져 내린다. 올바르게 살려고 하는데 실제로는 반대쪽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은 죄의 본성 때문이다. 사탄은 우리 안에 있는 탐욕과 교만으로 우리를 교묘히 조종한다.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착한 줄로 착각하게 한다. 이 악순환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께 의지해야 한다. 나의 능력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여야 한다. 나의 계획과 방법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일하심, 성령님의 일하심을 기대해야 한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형은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다. 형이 동생을 환영하지 못한 이유는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세리와 죄인들을 품지 못한 이유와 동일하다. 나아가 오늘날 교회에서 종교생활 잘하고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성도나 이웃을 환영하지 못하고 품지 못하는 이유와 같다. 형이 동생을 환영하지 못한 첫째 이유는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자기 의’ 때문이다. 둘째,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모르는 것처럼 자신도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것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셋째, 자신은 아버지와 늘 함께 있으면서 아버지의 모든 것이 자기 것인데도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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