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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앵두나무 우물가’ 유감(遺憾) 조회수 : 169
  작성자 : 박재준 작성일 : 2025-05-02

앵두나무 우물가유감(遺憾)

한때 온 나라가 이 유행가를 모르면 촌놈(?)이라는 놀림도 감수해야 될 때가 있었다. 실은 대처(큰 도시)보다는 정감어린 사골 풍경이 먼저 떠오르는 것도 당연지사이리라. 우물 주위에 아낙들이 둘러서서 두레박질 하며 얘기꽃을 피우는 정경은 조상들로부터 전해 온 소통과 한풀이의 해방구가 아니었을까?

내친김에 흥도 돋울 겸 향수를 불러 올 앵두나무 처녀’ 1절을 옮겨본다.

(1955년 발표된 한복남 작곡/김정애 노래이다)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 바람났네 / 물동이 호미자루 나도 몰라 내던지고 / 말만 들은 서울로 누굴 찾아서 / 이쁜이도 금순이도 담봇짐을 쌌다네.”

그런데, 네이버지식백과에 의하면 앵두나무는 건조환 환경에 강한 편이나 과습에는 약하므로 배수관리를 잘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아니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 있단 말인가. 습한 우물 주위는 천적과 동침하는 꼴이니 생육 할 수가 없고, 어느 거짓말쟁이가 퍼뜨린 바람난 누군가 서울에서 잘 산다는 소식이 삽시간에 퍼져 너도나도 따라서 물동이를 내던지고 담봇짐을 싼 게 아닐까? 아마도 작사가는 옹기종기 모여 담소 나누는 빨간 입술들이 꼭 농익은 앵두같이 보였겠고 열매 수확기인 4~5월을 영원히 묶어 두기 위해 떠올린 것이 앵두나무로 메타포 처리하지 않았을까 한다.

앵두와 우물에 얽힌 나의 기억을 소환한다.

여느 시골과 다름없는 평범한 마을 한복판 십자로에 고향집이 자리하고 있다. 부잣집은 으레 개인 우물이 있고 빈자들을 위해서는 공동우물이 군데군데 있는 모양새였다. 당시는 대가족제도라 한 가족 당 10명 내외가 보통이었고 우리도 조부모, 부모, 삼촌, 6남매로서 11명이었다. 부엌 곁에는 엄청 큰 물항아리 두세 개와 좀 떨어진 곳에는 구정물 통이 자리 잡았다. 날마다 우물물을 길어다 항아리 한가득 채우는 게 부녀자와 우리들의 임무였다. 특히나 갈수기에는 부잣집 마당에 있는 우물물을 눈치보면서 길어 와야 했다. 이렇듯 물의 소중함과 재활용(리사이클링)을 일찍부터 알았고 소나 돼지 죽통의 물을 위해 설거지나 세숫물 등을 따로 모았다. 아마도 어린 마음에 불평과 짜증도 많이 내었으리라.

세월이 흘러 어느 날 아버지께서 중대 발표를 하셨다. 우물을 파겠다는 것이다. 온 가족이 야호! 환호를 하며 박수를 쳤다.

대문과 부엌 사이에 삼발이를 세우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인건비 한 푼이 아까운 터라 오롯이 우리 가족끼리 양철동이에 흙과 자갈을 올리고 내리는 데 혼신의 힘을 쏟았다. 아버지와 삼촌은 땅을 파 들어가고 우리는 위에서 끌어 올리는 작업을 했다. 며칠이 걸렸는지 기억도 없지만 어느 날 아버지께서 한숨을 쉬시면서 절망적인 표정을 지어셨다.

엄청난 크기의 청석(바위)이 밑바닥에 박혀있어 공사실패라는 것이다. 온 식구가 펄썩 주저앉았다. 어린 나도 줄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봤다. 거북등짝 같은 놈이 우물 밑바닥 전체를 덮고 있었다. 절망의 밤을 보내고 밝은 아침에 보니 한쪽 구석에서 물이 베어 나온 흔적이 보였다. 온 집안이 덜썩거렸다. 지나가던 물길이 낮아진 압력차로 스멀스멀 나온 것이다. 우물 바닥에 고인 물을 퍼내어야 하는 수고가 덤으로 따라왔지만 즐거움은 오히려 쌓여만 갔다. 이후 원통형 도래석(일명 돌우물) 쌓기와 흙 되 메우기는 일사천리로 진행하여 아귀까지 마무리 짓고 우물정자(井字) 흄관을 안착함으로써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어느 해인가 삼촌께서 작은 고모네 집에 들렀다가 앵두나무 한 그루를 가져와 심었다. 삭막한 주위보다 푸른 나무라도 있으니 운치도 있었고 식구들의 지극 정성이 속성으로 큰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열매까지 달리니 유일하게 우리 동네에 앵두나무 우물집으로 불리게 되었다. 어린 나에게는 매년 보릿고개 철이 기다려지고 입맛 돋우는 간식거리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세월 따라 가족 수도 점점 줄어들어 빈집처럼 되고, 경제발전의 덕택에 형형색색의 과일이 등장하면서 이 앵두는 천덕꾸러기가 되어 온갖 날짐승들의 전용 만찬식탁으로 변했다.

2020년 여름은 역사상 최장 54일간의 장마로 인해 우물 아귀까지 물이 차는 바람에 앵두나무 뿌리가 숨을 쉬지 못해 고사하고 말았다. 한마디로 뿌리 전체를 젓 담근 격이다. 공교롭게도 장본인인 삼촌(기독교인)도 같은 해 12월에 타계하고 말았다. 초목에도 정령이 있단 말인가. 참 우연치고는.

이 글에 힘을 싣기 위해 발품의 수고까지 곁들였다. 2021227일 대나무 장대로 우물의 실제 깊이를 재어보니 아련한 기억보다 조금모자라는 5.5미터(아파트3층 높이)였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마을의 전설인 앵두나무 우물가신화가 깨진 것이다. 다행히도 우물만이라도 홀로 남아 그 흔적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가물에 콩 나듯 고향에 들릴 때 마다 편리한 상수도 대신에 우물에 두레박을 담그면서 나직이 물망초(Forget-me-not)를 부른다.

                                                            20210331일 세일 박재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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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댓글 2

박재준2025.05.02 15:22
본 수필은 2021년 3월 울산제일일보 *인생한담* 칼럼에 기고된 것이며,
보잘것 없지만
재미로 보시기 바랍니다.
김창훈2025.05.14 09:40
앵두나무 우물집 출신이시군요. 아름다운 추억을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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