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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고향 마을‘흑석리’의 전설 조회수 : 191
  작성자 : 박재준 작성일 : 2025-07-04

                      고향 마을흑석리의 전설

김밥말이도 눌리면 옆구리가 터진다고 여러 피치 못 할 사정으로 중수필(Essay) 길이 막히니 우회로를 찾을 수밖에이름하여 경수필(miscellaneous)을 쓰기로 작정했다. 현재까지 50여 편의 수필이 울산제일일보를 위시(爲始)하여 타 매체에도 등재되었다. 참 감사한 일이다. 그때 마음속 버킷리스트에 첫째로 떡하고 자리 잡은 것이 오늘의 주인공 고향 마을의 전설이다.

속담에 무식한 귀신은 부적도 겁내지 않다, 배운바가 적으니 발로 뛸 수밖에 없다. 그냥 내밀어 보는 것이다. 눈으로 보고, 입으로 맛 봐야만 직성이 풀리고 담대함은 뒤따라오는 논리다.

무작정 청도문화원 주소를 찾아 전화기를 돌렸다. 들려오는 여직원의 상냥한 목소리에 좋은 예감이 들었고, 인사 겸 통성명 후 나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긍정적 답변이 돌아왔다. 관련 자료는 있으나 줄 수는 없고 복사해 가면 된다는 것이다. 한 보름여가 흘렀고, 오늘이 바로 그 날이다.

조그마한 군 소재지라 찾기는 쉬웠다. 현관문을 열고 보무도 당당하게 들어갔지만 어느 사무실인지 찾지를 못하고 우왕좌왕 하던 중 어떤 분이 보기가 딱했는지 친절하게 자청하여 안내를 했다. ‘향토사학연구회회장과 마주했다.

나 자신을 소개 후 어떤 차를 원하느냐? 하고 묻길래 그냥 웃스개소리로 길표 다방커피라 하고는 같이 웃었다. 이로써 일단 아이스브레이킹은 된 셈이다. 방문 목적을 밝히니 선뜻 두툼한 책 한 권을 내밀며 가져도 좋다고 했다. 횡재다! 입으로 튀어 나올 뻔했다. 마스크 너머로 얼굴이 웃음으로 뽀록이 났으리라. 아무튼 너무 고마워 연신 고맙다는 인사말이 계속되었다.

책 이름도 마음에 쏙 들었다. 2019년에 펴낸 청도마을지(淸道마을)였다.

이태나 늦게 글감으로 미루었다가 맞이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닐 것 같다. 꼭 이 책이 내 것이 될 운명인양 기다리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198페이지에는 우리 마을 흑석리 명칭에 대해 이렇게 소개했다. 흑석(黑石)의 명칭 유래는 선사시대의 고인돌인 검은돌이 많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또한 밀양군지에 흑석(黑石)은 금물석(今勿石)이라 하는데 마을 들판에 검은 돌들이 놓여있으므로 이름 하였다(俗稱 今勿石 縣前 有 羅 黑石 故 名, 속칭 금물석 현전 유 라 흑석 고 명). 비록 한 두 줄이지만 학술적으로 뒷받침을 해 주니 든든한 마음 가눌 길 없다.

어릴 적 선친께서 가끔 들려주시던 여러 가지 얘기 중 마을의 전설에 대해서 희미하게나마 뇌리에 남아있다. 동네에 내 나이 또래가 최고령자니 어디다대고 물어 볼 수도 없고 전설의 진위를 객관적으로 뒷받침 해줄 자료도 없다는 것이 유감이다.

마을 앞에는 28개의 거대한 돌(一名 고인돌)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공교롭게도 천체의 별자리 수 28(宿)와 일치하여 천문학과도 연관이 있다는 얘기도 있었다. 또 하나는 중국 만리장성을 쌓을 때 중국 장수가 회초리로 돌을 때려서 굴려가던 중 전갈이 왔다. 축성완료로 불필요해서우리 마을 앞에 그냥 버려두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전설 중의 백미(白眉)는 회초리에 안 맞으려고 바위가 제 발로 굴러갔다는 얘기였는데, 어린마음에 얼마나 신이 났는지 모른다.

우리 밭에도 바윗돌이 하나 있었지만, 이거야말로 화이트 엘리펀트(White elephant)같이 눈엣가시였다. 바위 자체가 차지하는 면적에다 반경 1~2미터정도는 소와 쟁기가 닿지 않으니 불모지나 다름없고, 그 그림자까지 드리우니 주위에는 식물의 성장까지도 지장을 주었다. 한 술 더 떠 바위 밑은 항상 습하기 때문에 온갖 뱀들의 소굴이었고, 주위에 갈 때마다 뱀의 출현으로 모골이 송연해졌으며, 가끔 물린 경우도 있었고, 독사가 아닐 때에는 감사 할 따름이었다.

어느 해인가 큰 홍수로 동네 앞 개울가 제방이 심하게 유실되었고 특히 우리 논() 주위가 집중피해로 복구불능 상황까지 갔었다. 피해대책을 세우려고 긴급히 온 동네 회의가 열렸다. 선친께서 우리 밭에 있는 돌로써 제방용 축대를 쌓겠다는 제안에 갑론을박으로 밤을 홀랑 새웠다. 마을의 수호신 같은 존재인데 훼손은 곧바로 동네에 액운을 불러온다는 반론이 만만치 않았다.

사랑방은 며칠씩 동네 유지 분들의 토론장이 되었고 선친께서는 초지일관 역사적 논리로 고인돌 자체가 하나의 단순한 무덤일 뿐이라고 미신에서 벗어나자고 설득이 계속되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우리는 비밀리에 석공(石工)을 고용해 밤새 파쇄작업을 마치고 제방용 축대작업을 완료하였다. 이때의 공사와 관련한 에피소드 한 토막.

막상 석관(石棺)을 열어보니 유골은 진토로 변했고, 다른 흔적은 발견 할 수 없었다. 사실 은근히 기대했던 부장품(副葬品) 한 개라도 건졌더라면 그야말로 도랑 치고 가재 잡기가 됐을텐데.

그래도 석관 몇 조각만큼은 훗날 우리 집 사랑채 구들장으로 요긴하게 쓰긴 했지만.

한동안 견원지간(犬猿之間)같이 말도 섞지 않고 지내던 고향마을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동네 사람들은 그제서야 안심이 되었는지 앞 다투어 자기네 밭의 돌을 자진 철거하여 웃지 못 할 한바탕 해프닝으로 끝을 맺었다.

면면히 내려오던 전설은 잃어버린 지 오래다. 하지만 고향마을은 오늘도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202574일 박재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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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댓글 1

박재준2025.07.04 14:48
2022년 4월 23일 울산제일일보 '인생한담' 칼럼에 등재된 것이며
제미로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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